[1] 자신감 없는 겁쟁이
어려서부터 늘 자신감이 없었던 나는 도전적인 사람들을 동경했지만, 반면 스스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친구들의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는 내 모습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어디를 가도 나는 제대로 해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내 뒤를 따라다녔고, 그렇게 겁만 먹고 살아오다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내게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다.
졸업 이후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아 떠밀리듯 입학했던 전문학교와 재수학원에서는 기본적인 커리큘럼을
따라잡지 못했고 적응하지 못했기에, 도망치듯 그 곳을 나온 이후 자괴감에 빠져 1년이란 긴 시간을 방황하며
경증의 우울증을 앓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때 도전하지 않고 피해 다닌 것을 후회하며 새로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금 출발하고 싶다는 생각을 되뇌이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어차피 나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었다. 그렇게 길고도 무미건조한 시간을 지내오다가 어느덧 때가
되자 병무청에서 검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누가 봐도 저체중에 체력도 약했던 내가 4급을 받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세상이 겁이 나서 아무것도 마주하지 않고 한심하게 살아왔기에 4급을 받는 건 내심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고, 자괴감은 들었지만 나를 바꾸고자 하는 의욕마저 생기지 않았다.
[2]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떠한 풍파를 맞을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오던 그 시기에, 집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벌여놓았던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집안의 형편이 나날이 나빠져 가기 시작했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빚을 졌던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 사정이 점점 기울어지자 간단한 의식주마저 해결하기
어려워졌고, 아버지가 짊어진 책임과 죄책감의 무게는 푸념 섞인 높은 언성으로 어머니와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아들로써의 도리를 해내지 못하는 무력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져
자책감만 커져갔다. 하루에 한 끼를 제대로 챙겨먹기도 힘든 상황이 되자, 동생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작은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나도 고된 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나서서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해보아도 빚진 금액은 상환될 기미를 보이질 않았고, 아버지가 매일 기울이는 소주잔과 뻑뻑이는
담배의 양의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힘든 나날을 보내시다, 어느 날부터 통증을 호소하시며
앓으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병원에서 신장염 진단을 받고는 별일 아니리라 생각했었지만, 약 1주일동안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큰 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검사결과 병원에서는 경과가 어찌될지 모른다며 당장
입원할 것을 권유했고, 우리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병명은 ‘다낭성신질환’으로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따져 보았을 때 어머니는 10년도 안남은 기간 내에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버릴 수도 있었다. 부모님께 여태 못난 자식 노릇만 해왔는데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시간만 낭비하며 살다가는 평생을 후회하며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맘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자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대신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물 한모금도 소화를 하지 못하시고, 곧바로 게워내 버리셨기에
아무것도 입에 대시지 못했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셨고, 그럼에도 허기에 차서 ‘요플레’ 라도
드시고 싶어하셨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이 멘 적도 많았다. 그러고도 어머니가 고작 병원비 때문에
부담을 가지시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늘 밝은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이렇게 가족들이 전부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내가 아무런 보탬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화가 났다. 더 이상 겁쟁이처럼 살기
싫었고, 남들만큼, 아니 남들보다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멈춰있다간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젠 숨어있지만 말고 스스로 변화를 갈구하고자 마음을 바로 먹기로 했다.
우선 내가 지금 당장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없어 찾는 곳도 없고,
나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나를 원하는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나를 찾고 있는 곳이 딱 한군데 있었다. 바로 군대였다.
[3] 변화
기본적인 체력을 기르기 위해 어머니의 병문안을 갈 때마다 약 5km 쯤 되는 거리를 걷거나 뛰어다녔다. 워낙
체력이 약해 힘에 부치긴 했지만 노래를 들으며 움직이니 그럭저럭 뛰어다닐 수 있었다. 병문안을 다녀온
이후 시간이 남으면 다시 1시간 거리 뒤편에 있는 서점으로 향해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다. 스스로
‘나 이런 사람이다!’ 라고 할 만한 재주가 없어 느끼고 있던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책을
찾아다녔다. 남들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다만 가장 골칫거리였던 문제는
체중이었다. 4급 판정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고, 가정형편 때문에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잊어버린
지 제법 오래였다. 살을 찌우기 위해 인터넷이나 책 등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했고, 그나마 값이 싼 바나나를 매우 많이 먹었었다. 기초체력증진도 필요했기에, 틈틈이 근력운동을
병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번도 정상체중에 도달해 본 적 없는 몸이었기에 살이 찌고는 있는 것인지
체감하기도 힘들었지만, 현역판정을 받고자 하는 의지로 재검을 받는 날까지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재검 당일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 차례가 되고 “김준일씨 체중계 올라가세요.” 라는 말에
체중계에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살며시 발을 올렸다. 합격기준인 50kg에서 불과 1kg이 모자란 49kg으로 또
다시 4급 판정이 나오고 말았다. 그간 노력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또다시 4급
판정이라니…….’ 여태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일념으로 노력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1kg차이로 내 각오를
누그러뜨린다는 건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담당관에게 선처를 부탁했으나, 검사결과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담담한 대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온갖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득 갑작스레 체중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양해를
구한 후 곧바로 정수기로 달려가 2L가량의 물을 배가 터질 정도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시금 검사를
받았을 때 50.7kg으로 3급 기준치에 도달해 현역판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물론 한 번에 합격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합격기준을 통과하였고, 당시 담당관께서는 입대를 원하는 나의 신념을
존중해 주셨던 것 이었다. 재검을 받고 온 날 당일. 나는 그때가 돼서야 부모님께 검사결과를 보여드렸다.
처음에는 의아해 하시던 부모님도 이내 납득하셨고, 이날 그동안 한 번도 나를 따듯하게 대해주신 적 없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를 포옹해주시며 “아들 이제 진짜 남자가 되었구나!” 라는 말로 나를 인정해주셨다.
내게 있어 새로운 도전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더욱 뜻 깊은 날이 될 수 있었다.
[4] 제 발로 군대에 들어서다.
보충대에서 입영식을 거치며 부대 안으로 들어가기 전 함께 온 어머니와 동생의 모습을 찾으며 눈시울이
붉어졌었지만 이내 부대 안으로 들어오게 되니 모든 생각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괜히 남들 다
오고 싶어 하지 않는 군대에 괜히 온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여기서부터 포기해버리면 앞으론 영영
재기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4일이란 기간 동안 벌써부터 적응을 해나가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따라 배우려 노력해보기도 하였다. 자대 배치 날. 걱정은 설렘으로 바뀌어있었고
함께 생활을 하던 동기들과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25사단 신교대 버스에 발을 올렸다. 다들 잘 알지
못하는 생소한 사단이었기에 어떤 곳인지 기대에 부풀어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 역시 좋은 곳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버스 안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당장 튀어 나와!” 얼마나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조교의 고함에 놀라서 황급히 의류대를 들고 버스 밖으로 튀어 나왔다.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 시설에
놀랄 틈도 없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교관들의 지시를 따랐다. 교관들과 조교들은 250명 남짓 되는 훈련병들을
능숙하게 통제했다. 나는 한 교관에게 건강소대란 곳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원하여 그 곳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내가 지내게 될 1생활관의 사람들은 건강소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들 묵직한 체구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다들 살을 빼러 온 마당에 나 홀로 저체중 인원이었기에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들
신체적인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대하지 않았다. 함께 생활하던 동기들
중엔 체중감량을 위해 온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운동을 좋아해 오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힘을
어느 정도 쓸 줄 아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나 역시 뒤처지고 싶지 않아 동기들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니고
하나라도 더 들고 다니려 노력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조금 굼뜨긴 해도 내가 마냥 미워보이진 않았는지
조교와 동기들도 내 잦은 실수도 감싸주고 함께 어울려주었다. 덕분에 앞으로의 군 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얻으며 보람찬 훈련소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신교대 훈련의 마지막인 30km 행군을 하게 되었다.
무거운 군장을 메고 마지막까지 완주를 해냈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에 고스란히 통증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내 몸무게가 군장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힘든 훈련을 이미 모두 마친 뒤였기에
앞으로의 일과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상태가 오랫동안 호전되지 않아 수료식이 다가올수록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진 않을까 불안해졌다. 수료식 당일 날. 훈련 중 다친 환자들은 모두 행사에서 열외 하였지만 나는
수료식 행사에서 열외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세를 바로잡을 때마다 통증이
아려왔지만 뒤에서 부모님이 보고 계실 것을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가능하면 별 문제없이 군
생활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려 마음을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수료식 행사를 끝마치고 난 뒤, 나는
그동안의 근심을 모조리 털어버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셨고, 아버지도
나를 매우 대견하게 여기셨다. 늘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보살핌만 받으며 자라오다가 군대라는 사회 안으로
들어와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 스스로도 대견해 보였다. 가족들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비록 이제
막 군생활의 첫 발걸음을 디딘 것이었지만 동기들과 가족들의 격려에 힘입어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것 같은
용기를 안고 돌아왔다.
[5] 진정한 새 출발. 자대로!
수료식을 끝마치고 2주간의 훈련을 더 받은 뒤, 공병대대로 자대를 배치 받게 되었다. 새 출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고 그 동안 정들었던 동기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매우 아쉽기도 했지만, 그 동안 나를
응원해주었던 동기들 덕분에 앞으로도 무엇이든 잘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대로 향할 수 있었다.
자대에 도착했을 때, 이제부턴 내 스스로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바짝 긴장이 되었다. 선임들의
계급장을 볼 때 마다 나와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는 생각에 숨이 턱턱 막히기도 했지만, 계급을 막론하고
서로 학교에서 만난 선후배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며 제법 나쁘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중대 1소대 3분대에 배치를 받게 되었고, 선임들이 이것저것 알려주며 챙겨주는 동안 고마운 마음에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해내겠다고 각오를 다잡았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한 번 고장이 났던 다리는 내 다짐을
오랫동안 받쳐주지 못했다. 자대생활을 하며 이곳저곳 열심히 뛰어다니다보니 훈련소에서 다쳤던 다리부상이
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조금만 힘을 주어도 통증이 오는 바람에 뜀걸음부터 갖은 작업까지 열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갓 들어왔음에도 기본적인 것 하나 해내지 못하는 후임이었기에 선임들의 눈 밖에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침마다 붓기에 올라 통증이 생기는 다리를 보면서 차라리 잘하려면 이곳에서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하지만 마냥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었다. 내 스스로 잘 헤쳐 나가보고자 들어온 곳인데 계속해서 실망만 안겨주며 지내고 싶지 않았다. 비록 힘도 약하고 싹싹하지 못한 성격에 다리까지 다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보려고 노력했다. 입대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던 정비병에도 흥미를 붙여
보며, 뛰지는 못하더라도 남들보다 많이 들고 가려고 노력했다. 또 갖은 훈련이나 파견, 행사가 있으면
참여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긴장을 과도하게 한 탓에 잔 실수도 제법 많이 했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선임들도 하나 둘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6] 나의 병영생활
시간이 점차 지나며 내게 선뜻 말을 건네주는 선임들도 많아졌고 아래로 후임들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예전보다 확연히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나 이외의 다양한 사람들과도
마주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보고 배운 점도 많았고, 여유시간도 어느 정도 생기게 되니 자기 계발을 위한
기회도 많아졌다. 그동안 자신이 없어 시작하지 못했던 그림공부도 다시 시작하였고, 여러 가지 취미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전보다 스스로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거의 1년을 웃도는 기간이 남은 군 생활이지만 이곳에 왔다는 것에 결코 후회는 없다. 이곳에서 또 다른
출발의 기회를 얻어냈고 도전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입대하기 전의
나처럼 시간이 흐르는 데로 삶을 낭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게 군대는 새로운 출발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만일 군대가 그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곳은 자기발전을 위한 또 다른
기회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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