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무청 청춘예찬

[스크랩] 무대를 지키는 가장 아름다운 힘-송유택(우수상)-

조우옥 2014. 12. 19. 00:24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

그 시작은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보다 암담한 현실을 이겨내기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다.

나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학기 첫 날, 학과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들썩이던 어깨들과,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들이었다.

 

 

애써 당당한 척 했지만, 내 자신에게 느껴지는 실망감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전문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고 오로지 거실에 부착된 전신거울과 나의 직감만이 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 그 자체였다. 때문에 학과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우긴 했지만 정작 내 자신이 어떤 배우로 성장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뒤늦은 방황 탓에 ‘군 입대’라는 것은 내게 너무나 먼 이야기인 동시에 크고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습을 병행하고 있던 어느 날.

먼저 공군군악대에 복무하고 있던 동기 녀석이 나에게 넌지시 군악대 모집 공고를 알려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또 나를 놀리냐며 예민하게 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내게 찾아 온 기회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공군 군악대에서 노래하는 보컬병은 결원이 생겨야만 모집을 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다. 더구나 내가 지원했던 때는 전역시기와 복학 시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 지원자의 수가

평소보다 2-3배가 많았다고 한다.

꼬박 한 달을 준비했다. 부족한 노래실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으로 열심히 했다. 면접도 쉬이 넘길 수

없었기에, 공군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게 제일 도움이 되었던 건, 이 시기에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매력이 있는지를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면접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커졌지만, 무엇보다 이 면접을 통해 나 자신을 뛰어넘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기대감도 불안감만큼이나 날로 커져갔다.

 

각양각색의 지원자가 넘쳐났던 면접 날, 내 차례가 끝나고 심사위원석 뒤쪽에서 들려나왔던 다른

지원자들의 박수소리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과거의 나였다면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내게 주어졌던 면접 시간이 너무도 편안히

느껴졌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나를 마음껏 보여주었다는 생각에, 면접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드디어 끝났다며 속 시원히 웃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내 가능성을 알아봐

주신 것인지 나는 두 달 뒤, 공군 군악병으로 합격하여 진주에 있는 공군훈련소로 입소하게 되었다.

 간은 흘러, 공군사관학교 군악대 건물 앞.

‘이 곳이 내가 앞으로 지내게 될 공군사관학교 군악대구나’

처음 자대배치를 받은 날, 왜 그리 군화가 무겁게 느껴졌을까?

처음 선임들을 마주했을 때, 왜 그리 말을 더듬었을까?

훈련소에서 보냈던 첫 날 밤보다 자대에서 보냈던 첫 날 밤이 더욱 길게만 느껴졌다.

 

나의 이등병 생활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적응훈련과도 같았다. 노래를 할 때도 호흡과 발성이

기본이어야 하듯이, 군악대의 이등병들은 군악대원으로서 전역할 때까지 다양한 행사를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 기본이 더욱 중요했다. 악기를 다루는 법부터 시작해서 행사 시 복장을 단정히 하는 법,

행진 때 오와 열을 맞추어 걷는 법 등 내 머리와 몸을 총동원해 익혀야 하는 것이 굉장히 많았다.

나는 보컬병이었기 때문에 악보를 외워서 연주해내는 연주병들의 일은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수많은 군가를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내 노래를 통해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가를 배우기도 하고 또 행사시엔 일반 관객들에게 내 목소리가 군가를 들려주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더욱 연습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나의 첫 행사는 바로 군가교육이었다. 신입 생도들에게 공군의 군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그로

인한 막중한 책임감은 나를 연등시간까지 공부하게 하였다. 덕분에 그 후에 다양한 행사엔 악보를

보지 않고 관객들을 보며 힘차고 당당하게 군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겨울잠과도 같았던 이등병 생활이 지나고 일병이 되자 세상에도 새싹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나는 코러스 역할이 아닌 메인 보컬로서 행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중에

우리나라의 큰 행사 중 하나인 진해 군항제가 있었다. 그 곳에 우리 공군사관학교 군악대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타군도 참가하는 아주 큰 행사였기 때문에 다들 밤낮없이 연습에 매진했다. 그 결과 만 명이

넘는 관객들 앞에서 우리 공군은 당당한 위상을 떨쳤다. 나도 그 자리에서 한 몫 해냈다는 것이

너무나도 뿌듯했고 공군으로서의 자부심도 굉장히 커졌다.

이와 같이 나는 공군군악대원으로서 행사를 통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관객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노래로 소통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행사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들이

담겨있는지를 몸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난 제자리에서 만족하기 보다 더

나은 무대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환한 미소로 달려와 꽃다발을 안겨주셨던 관객분.

고등학교 축제에 가서 그들에게 꿈을 연주해 주었던 날.

항공우주캠프를 통해 공군의 멋을 배우고 간 외국인 학생들.

열심히 노래하고 연주하는 우리들을 손자처럼 봐주시던 독거노인 분들.

수 백 가지의 행사를 해내면서 어느 덧 내겐 네줄짜리 병장마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러보니,

내 곁엔 어느 새 가족 같은 군악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 노래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내가 세운 계획에 맞추어 하루 온종일 연습해 준 선·후임들 덕에 악·폐습 근절 연극제에서 1등을

한 일은 지금까지도 그들에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가끔

오해가 있었다면 그 계기로 화해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 군악대는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병장으로 진급한 후에도 으뜸병사 활동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고, 전역 전 날까지 게을러지지 않게

공부도 쉬지 않았다. 이 시기에 노래하는 것을 넘어 음악 그 자체에 관심을 많이 두게 되었고 뮤지컬

제작에 대해서도 꿈을 가지게 되었다.

전역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머리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채, 뮤지컬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심사위원석에서 질문이 들어왔다.

“근 2년간 경력이 없네요? 무슨 일이 있었죠?”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자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후, 합격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제 난 오디션장에 가면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떨리게 되었다.

‘바닥만 보고 노래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에서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나오게 될까라는

설렘이 자리 잡았다.

공연을 하면서 관객들의 눈 하나하나와 소통하는 것이 이젠 내게 용기를 주는 하나의 보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 보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년간의 값진 시간들이 만들어 준 선물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높은 힘!」

공군의 슬로건처럼 나만의 날개를 세상에 펼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계속 힘 낼 것이다.

늦은 나이에 입대한 공군. 그 시작은 암담한 미래보다 희망 가득한 내일을 알려주는 훌륭한 지표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젠 정말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관객들에게 들려주었던 희망찬 멜로디.

그건 돌아보니, 내가 내게 들려주었던 희망찬 응원가였다.

고맙다, 공군 군악대!

 

 

 

 

 

출처 : 청춘예찬
글쓴이 : 굳건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