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에 계신 어머니의 마지막 가을동화[5월 가족사랑의 달|가족이라서 고마워 ⑥] 빨간 감나무 아래 어머니의 모습, 추억으로 남아“한겨울이었어. 그날따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어둠침침했지. 하지만 네 아버지의 첫 프러포즈를 받는다는 생각에 추위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 단지 가슴이 쿵쾅거리고, 또 몸은 왜 그렇게 파르르 떨리던지...”
‘프러포즈’란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진한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는 두근거렸던 그 때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연상하며 말을 이어간다. 감칠맛 나게 뜸들이던 생애 첫 프러포즈는 이제 하이라이트로 치닫는다. 자세를 가다듬은 어머니는 그 다음 얘기를 꺼낸다. “청혼 고백에 넋을 잃은 채, 네 아버지 품에 안겼지. 어둠도 부끄러운 듯 붉게 변하는 것 같았어. 아마 포옹의 순간이 채 1초도 안 되었을 거야. 가까운 듯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졌지.” 어머니는 무척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1초의 황홀함과 0.5초의 놀람’ 찰나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네 아버지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어. 그러더니 갑자기 찬송가를 크게 부르는 게 아니겠어. 다행히 그 사람들과 별일없이 지나칠 수 있었지. 동류임을 느끼게 했으니까.” 한밤중 공원길에서 청춘 남녀가 크리스마스이브 예배를 마친 집단과 마주쳤고, 야음을 틈타 그들이 낌새를 못 채게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일행인 척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첫 프러포즈의 황홀감보다는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 재치에 끌렸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10년 전 홀로된 노모는 옛 추억에 잠기며 남편을 무척 그리워했다.
2000년, 새천년이 밝았다. 하루는 어머니 화장대 위에 놓인 네 마리의 돼지저금통을 보고 퍽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물을 담은 바가지에 동전 몇 개를 넣고 깨끗이 씻기 시작했다. 하도 이상해서 “어머니, 뭐 하시는 거예요?”하고 여쭸더니, 살며시 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리고 씻은 동전을 저금통에 차례로 넣었다. 그 후로 집에 갈 때마다 돼지저금통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만 갔다. #자식 향한 사랑, 복주머니에 가득 담아 그 의문은 설 명절 때 풀렸다. 4형제가 세배를 드리자, 어머니는 “가족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 잘되길 바란다.”며 성큼 복주머니 4개를 내놓았다. 지난 1년 동안 자식들을 그리며 푼푼이 모은 돼지저금통 동전이었다. 그 동전을 움켜쥐는 순간 어머니의 더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날 우리 형제들은 사랑의 세뱃돈으로 받은 깨끗한 동전으로 흥겹게 윷판을 벌였다.
그 뒤로 어머니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연로한 탓이거니 생각한 게 큰 잘못이었다. 지병이 있었지만, 자식들한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었던가.’를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노모의 여생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을까?’를 곰곰 생각하던 차,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 스케줄을 마련했다. 철마다 나들이 계획을 잡고 떠나니 어머니는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들판은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가을이었다. 한가로이 추정(秋情)에 잠겨 있을 때 어머니의 호출 전화벨이 경쾌하게 울렸다. “오늘 시간 좀 내줘. 시골 한 농가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는데, 싼 가격에 많이 준다더라.”며 운을 뗐다. 오랜 투병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노모께서는 자신의 삶을 구차해하거나 단념하지 않고 오직 병마와 굳세게 맞서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생활했다. 그날도 표고버섯 달인 물이 몸에 좋다는 입소문이 노모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예, 어머니.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하도 좋아 어머니와 함께 드라이브나 할까 했는데, 잘됐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1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벌써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는 현관 앞에서 서성대고 있다. 그렇게 고운 어머니의 모습을 예전에 본 적이 없어 한동안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친구들도 함께 가면 안 되겠니? 표고버섯을 사고 싶대.”라며 눈치를 살폈다. “당연히 함께 모시고 가겠습니다.”라며 단숨에 눈치를 잠재웠다. 그렇게 ‘표고버섯 나들이’는 시작됐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농촌에 들어서니 눈앞에 풍성함이 펼쳐졌다. 길가에는 빨갛게 익은 감나무가 열병식을 하듯 우릴 환영했다. 어머니는 친구와 들뜨고 설렌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애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와 친구 두 분은 황금을 거머쥔 양 버섯상자를 품에 꼭 안고 길목을 빠져나오다가 벌겋게 물들어 연방이라도 떨어질 듯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밭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손에 닿을락 말락한 감을 가리키며 한 분이 “감이 참 먹음직스럽게 열렸네.”라고 하자 “저 감은 곧 떨어질 것 같네.”, “까치밥치고는 너무 많은데.”라며 두 분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따 먹으세요.”하면서 “인건비가 워낙 비싸서 감을 딸 엄두로 못낸다.”는 말까지 곁들였다.
감나무 밭에 들어선 세 분은 얼마나 신났는지 이내 천진난만한 소녀티를 물씬 풍겼다. 언제 나이를 먹은 양 세월의 더께를 훌훌 떨쳐내고 동심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빨간 감나무 아래 황혼의 삶이 푸른 청춘으로 활기를 되찾으며 동화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을 여태껏 본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친구와 아름다운 가을동화 수놓으며 떠나 마지막 가을동화를 그려내고 떠나신 어머님, 이제는 편안한 하늘나라에서 천상의 그림동화를 수놓고 계시겠지. 어머니의 가을동화는 늘 가슴 속에 남아 따뜻하게 마음을 데운다. 그 훈훈함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데 자양분으로 자리잡았다. 아름다운 추억은 세월을 멈추게 한다. 오늘도 어머니의 곱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가족의 미학을 노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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