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오십 평생 몰랐던 친정 엄마의 여행수첩
오십 평생 몰랐던 친정 엄마의 여행수첩[5월 가족사랑의 달|가족이라서 고마워 ⑪]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준 엄마의 여행 유전자“엄마, 나랑 단둘이 여행 갈래?” 내 말에 엄마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좋지.”라고 대답했다. 이벤트에 당첨된 여행, 누구랑 갈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게 엄마였다. 리무진 버스 타고 인천공항까지 혼자 올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너는 날 어떻게 보는거냐?”라며 나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물원에서도, 식물원에서도 엄마는 내 나이 쯤에 겪었던 인생의 부침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덕분에 프랑스 사람처럼 긴 식사를 했다. 나는 엄마한테 궁금했던 걸 물었고 엄마는 대답했다.
“엄마, 아버지가 그렇게 보기 싫었는데 왜 참고 살았어? 그냥 헤어지지?” 장난기 어린 내 말에 “헤어지자고 했더니 ‘애들도 당신이 데려가고 집이랑 다 당신 가져!’ 이러더라. 자기는 몸만 나가겠다고. 진짜 그렇게 했다간 네 아버지 거지꼴 될까봐 가엾어서 그냥 주저앉고 말았지 뭐.”하며 피식 웃었다. 말수 적은 엄마에게서 재미난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엄마의 희노애락이 담긴 이야기를 듣느라 점심은 뒷전이 돼버렸다. 어렸을 때, 엄마는 예쁜 옷을 골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겨 4남매를 데리고 다녔다. 자연농원에도 가고 수덕사도 갔다. 형편이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늘 다녔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선 제 자식 챙기느라 바빴다. 내 아이들의 머리를 빗기고 예쁜 옷을 골라 입혀 이리저리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와 여행을 오니 예쁜 옷을 입고 엄마 손에 이끌려 다니던 그 때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엄마는 “너희들이 넓은 세상 보며 훨훨 날아다녔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라고 말했다.
엄마와 여행을 하며 가장 놀란 건 엄마의 여행수첩이었다. 엄마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초록색 표지의 낡은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엄마가 여행한 곳, 비행시간, 음식, 숙소는 물론 날씨와 특이사항, 성경구절 등이 적혀있었다. 얼마나 자세히 적어 놓았는지 마치 내가 그 여행에 동참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엄마가 펼쳐든 수첩엔 ‘은주와 일본여행’이란 타이틀이 달려있었다. “뭐라고 쓸 건데?” 하면서 엄마 옆으로 바짝 다가가자 엄마는 “별 거 없어. 며칠 날 뭘 했고 뭘 먹었나 정도 쓰는 거야. 쓸 때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읽어보면 정말 재밌어.”라며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알았다. 이번 여행의 기록도 두고두고 엄마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걸.
몇 달 후, 엄마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살림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된 엄마가 모처럼 만두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가 물었다. “그 때 싱가폴은 성원이 내외랑 간 거지?” 그러자 엄마가 대꾸를 했다. “저이 좀 봐. 그거 홍 서방이 보내준 거잖아요.” 엄마와 아버지의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려던 찰나, 엄마는 부리나케 방으로 가서 수첩을 꺼내들고 왔다. 아버지는 엄마의 수첩을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이 맞았어.” 아버지가 웃자 우리 모두 박장대소했다.
여행을 좋아하고 그 일을 기록하길 즐겨하는 나의 취미는 엄마에게서 비롯됐음을 알게 됐다. 엄마와 내 취미가 서로 닮았듯 내 딸과 나도 여행 유전자를 나눴으니 엄마에게서 나, 다시 내 딸로 이어지는 이 여행 유전자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복받은 유전자다. “엄마, 난 다른 건 필요 없고 나중에 이 수첩, 나한테 물려 줘.”라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수첩? 이거 말고 20개나 더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