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다시 찾아온 봄. 몸도 나른해지고 모든 것이 무료해지던 어느 날 우편하나를 받았다.
자원입대를 통해 병역의무의 숭고함을 일깨워 줘서 감사하다는 내용, 자진이행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체험수기를 공모한다고. ‘아! 여기 내가 원해서 온 거였지...’ 그제서야 1년 전 내가 이곳에
오기위해 얼마나 열심이었던가를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나왔다. 한 번 더
그 때의 나, 초심을 갖고 군 생활을 하기 위해, 이글을 읽게 될 아직까지 입영하지 않은 내 또래
친구들을 위해 내 작은 얘기를 끄적여 본다.
진학한 이후로 줄 곧 어리게 보인다는 말이 꼬리표 처럼 수식어로 따라 붙었다. 언제 나의 자신감을
떨어뜨릴지 몰라 떼어 내고 싶었다. 콤플렉스로만 여기던 나의 체형은 2011년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결국
발목을 잡았다. 대한민국 20대 청년이라면 모두가 다 가는 곳, 가야만 하는 곳인 군대를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게 된 것이다. 신검 판정은 4급이었고 저 시력에 체중미달이 그 이유였다. 주변에서 시선이 모여들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부럽다... 공익이래”, “나도 4급 나왔으면 좋겠다.” 등등... 편하게 군복무를 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하는 이유인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히려 저렇게 수군거리는 게 나를
놀리고 비웃는듯하다고 느껴져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빨리 숨고 싶었다. 그 것이 당시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미 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나눠주는 복장을 가장 작은 사이즈로 갈아입었을 때부터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학창시절 받는 신체검사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신체검사가 있는 날은 시험이 있는
날보다 더 싫은 하루였다. 어쩌다보니 나는 대학교를 1년 더 다니게 되었다. ‘어차피 공익으로 가는 거 나중에
가도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 ‘친구들은 건강하게 입대하는데 나는 왜?’ 라는 생각과 창피함, 부끄러움이
겹치면서 차일피일 미룬 것일 수도 있다. 복학한 선배님들은 항상 그랬다. “군대 언제 가냐? 남자라면 현역
갔다 와야지!” 알게 모르게 “예. 현역 갔다 와야죠.” 라고 웃어넘기듯이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게 그 당시는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아~ 쟤는 키도 작고 말랐으니 공익을 가는 게 맞지”
이 말을 듣기가 싫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중 1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마치 노래가사처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작은 키에 마른 편이었다. 물론 지금도. 때문에 대학교에
너무도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라고 부모님 탓을 해본적도 있었다. 친한
친구들마저 다들 현역에 입대하고 몇몇 친구들은 해병대, ROTC를 스스로 결정하기도 했다. 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늘 자책했지만 힘든 군 생활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부모님과 친구들은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겨우 신체적 콤플렉스 하나 때문에 남들이 가는 곳을 못 간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나중에는 오히려
억울해졌다. 내가 안 가고 싶어서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못’ 가는 것이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싶었고, 그 작은 바람은 오기가 되어 큰 도전을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 군대
갔다 왔다” 고 주변에 떵떵거리기 위해서라도 현역판정 및 군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군대에 멋있게 갔다 오고 싶다고...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었다. 살을 찌워 재신검을 받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목표는 간단하게 ‘10kg 찌우기’로 정했다. 누가 보면 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체중 늘리기란
시험공부보다 어려웠다. 평소 먹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입이 짧아 많이 먹지를 못하는 식습관을 가져 무엇부터
차근차근 해야 될까 고민이 많았다. 인터넷도 뒤져보고 식습관 조절책도 읽어보고 주변에 운동 좀 한다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한 목소리였다. 무턱대고 인스턴트식품만 많이 먹기를
고집한다면 건강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말이다. 차근차근 끼니의 탄수화물 섭취량을 늘리고 끼니 사이사이에
간식을 섭취하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휴가 나온 친구들에게 물었다. “군대에서 체력을 기를 때 어떤 운동을
하냐?” 십중팔구 스쿼트,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를 꼽았다. 본격적으로 식습관 조절 및 운동을 시작했고,
하루, 이틀. 팔, 다리에 알이 배어 움직이기도 힘든데 먹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받았다. 끼니 사이사이엔
찐 감자, 고구마, 햄버거를 먹었다. 가끔 배가 불러 입맛이 없을 땐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집근처 경포호수
한 바퀴를 돌고 와서 먹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부모님과 친구들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부모님께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스스로 힘들다고 하는 군대에 가겠다고 하니 1년 9개월간
고생할 아들 생각에, 떠나보낸 후 느낄 공허함에 슬퍼질 것이라고 진심 어리게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자일지라도 입대를 하고 나면 분명 부모님 생각도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내 자신에 대한 한계를 극복해서 멋진 아들이 되어 돌아오고
싶다고, 다른 누구에게 늘 자랑하고 싶은 아들이 되겠다고...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체중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몸이 건강해지니 마음도 건강해진다고, 자신감에 가득 찬 채 기분도 좋아졌다. 그리고 2013년 2월
초 강원도 강릉에서 사는 나는 경기도 의정부 병무청까지 찾아가 재신검을 받았다. 병무청에는 첫 신검대상자
및 재신검대상자가 함께 있었다. 문득 1년 전의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했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조금은 웃긴
얘기지만 체중계 위로 올라가기 전 화장실에서 미리 사둔 생수 한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렇게라도 하면
몸무게가 올라가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검사가 끝난 후 현역판정 담당자 분께서 “참 보기 드문 케이스야
군대 가려고? 남자네~” 라고 마치 놀리듯이 나를 응원해주었다. 그렇게 현역 3급 대상자로 판정을 받고 가장
빨리 입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연고지 복무 병이라는 모집 병 제도를 찾게 되었다. 강원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착순으로 살고 있는 지역 부근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제도였다.
그 누구보다 모두가 꺼리는 대한민국 전방, 그것도 산악지대인 강원도에서 복무하고 싶었다. 빨리 군대 가려면
그 방법밖엔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2013년, 4월 23일.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머리를 짧게 밀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한 모습으로 춘천
102보충대로 들어갔다. 1년 9개월간 이곳에 몸담아야한다고 생각하니 차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내가 여길 스스로 오겠다고 하다니 새삼 내 자신이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말로만 듣던 속칭 ‘군대리아’를 먹게 되고 종교행사에 가서 초코파이 하나에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입영 후 수많은 이 남자들 속에 나는 1명의 군인이었다. 3일간 대기를 하면서 내가 교육받을 신교대와 자대는
어디일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생활관 내에 있는 동기들과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어느 부대가 훈련이
많다고 하더라... 좋은 보직을 받았으면 좋겠다... 좋은 선임들이 있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등등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두 손을 모아 쥐며
내 신교대와 자대가 결정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2사단?” 그 곳이 어디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군용버스를 타고
신병교육대로 이동했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주변에 보이는 논밭들,,. 강원도 양구였다. 22년간
강원도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 허름한 동네에서 버스는 신병교육대라고 써져 있는
입구 안을 지났다. 버스가 멈추고 그 잠깐의 정적의 순간 동안 침은 바짝바짝 말랐고 등을 등받이에서 뗀 체
고개만 쭈뼛쭈뼛할 뿐 이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빨간 모자를 눈썹까지 푹 눌러쓴 조교가 올라왔다. “30초
줍니다. 전 인원 다 하차합니다.” 각오는 했지만 살짝 기가 눌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모른 채 조교의 눈과 입에 오감을 집중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행동 하나하나엔 각이 잡혀있었고,
목소리는 커져있었고, 정리정돈과 청소 및 예절이 머릿속에, 내 몸 속에 깃들어 있었다. “107번 훈련병
이!! 승!! 섭!!” 매일 수십 번씩 내 이름을 이렇게 까지나 불렀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제식훈련, 눈물 콧물 다
쏟고 1분이 1년 같던 화생방훈련, 땀이나 바지춤에 손만 계속 닦던 수류탄 투척훈련, 한 여름 날씨에 태양 볕을
내리 쬐며 16km 주간 행군을 했을 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체력적한계로 인해 시작한지 4km 되는
지점에서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왔고 끝내 군장을 내렸다. 매사에 자신감 있게 훈련을 받아왔지만 처음으로
맞는 좌절이었다.
3주 후 다시 찾아온 야간 30km 행군. 날씨는 밤인지라 덥진 않았지만 5, 10, 15, 20km 지점을 지날 때마다
지속적인 고통에 맞섰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인내심을 갖고 나도 한번 해보자고 굳게
다짐하고 다짐하며 한걸음씩 걸어 나갔다. 무릎은 걸을 때마다 끊어질 듯 아파왔다. 매번의 휴식시간 마다
진통제를 먹고 파스를 어깨, 목 뒤, 무릎에 뿌려댔다. 기어코 다음날 새벽 다리를 절면서까지 막사 입구로
들어왔을 때, ‘나를 넘는다’라는 군가와 함께 들리는 박수와 함성소리... 고생한 동기들과 마주하며 서로
격려해주고 축하해주었다. 개인의 전투능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배운 각개전투훈련. 산악지대를 몸소 타보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엄폐를 하고 완수신호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 진짜 군인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찜통 같은 날씨에 땀에 젖은 채로 그늘 밑에서 쉬며 동기들과 수통의 물 한 모금씩 나눠 먹을 때,
시도 때도 없이 물어대는 모기들과 함께 땀 냄새 진동하는 생활관에서 동기들과 좋다고 부둥켜 자던 그
순간들은 영원히 추억거리로 남게 될 것 같다. 신교대에서 맞은 생일은 정말이지 군 생활에서 손에 꼽을 만한
일이었다.
내 생일이었던 5월 5일. 취침점호가 끝나고 불이 꺼진 생활관에 조교가 케익을 들고 왔다. ‘군대에서...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신교대에서.. 생일도 챙겨주는구나’ 40명 남짓 되는 소대의 동기들도 모두
축하해주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한 목소리 “어 왜 양초 22개야? 21개 아니야?” 남보다 늦게 입대하게 된
얘기를 동기들에게 뒤늦게 얘기해주었고 다들 의아해했지만 남자답다고 멋있게 잘 왔다고 축하해주었다.
며칠 뒤 취침하기 바로 전 조교에게 편지 하나를 받았다. 부모님께 온 편지였다.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남몰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멀리서 응원하고 있고 나라를 위해 고생하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군대에서
받는 편지가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무심하게 읽던 중 마지막에 적힌 ‘ -2013년 5월 5일 사랑하는 아들에게- ’
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들생각으로 밤에 잠을 뒤척일 부모님을 생각하니
이렇게 건강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부터 혼자 멀리 떨어져있어 죄송하다는 생각까지 만감이
교차했다. 군대에서 받은 첫 편지이자 부모님께 받은 생애 첫 편지였다. 군대가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 같다. 이후 23사단으로 삼척에서 해안 경계 작전을 하는 부대로 자대배치가 되었고, 한여름에
이등병 생활과 해안 경계근무를 하게 되었다. 1년 늦은 입대로 인해 나이와 계급에 대해서 부딪히는 점이
많았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녔다. 힘보다는 머리와 스피드로 인정받는 병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매일같이 공부했다. 아르바이트와 학교 선배님, 친구들이 전해준 노하우가 많이 도움이 되었다.
여름이면 모기, 벌레들의 끊이지 않는 습격과 더위와의 전쟁이고, 겨울이면 폭설과, 한파 속에서 밤을
뜬눈으로 보내야만 한다는 게 힘들었다. 방한피복을 다 입고도 발가락은 차갑고 감각이 무뎌졌지만 옆의 늘
사수, 혹은 부사수의 전우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적이 올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서는 해안 GOP에서의 경계근무는 쉽지 않았다. 공휴일도 없고 주말도 없는 이곳에서 매일 밤마다 4~6시간씩
감시를 하다보면 피로가 점차 누적되는 건 기본이고, 이렇게 깜깜한 동해바다와 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면 가끔
‘밖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 라는 공허함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가 있기에 나의 가족,
친구들, 더 나아가 국민이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다.
그렇게 전입이후로 나는 계속 해안에 남아 매일같이 초병으로써 군 생활을 하고 있다. 요즘 들어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와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감행으로 인해 더욱 더 근무기강을 바로잡고 완전작전달성에 열의를
가지고 근무를 서려고 노력하고 있다. 항상 내 앞으로 적이 온다고 생각하고 숙달된 전투기술과 체력을
기반으로 적 도발 시 현장에서 즉각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5~60명 되는 소초 인원들이 매일 같이
고생하고 있다. 간부님들, 선임분들, 후임들, 동기들, 기타 모든 해안 소초병력들에게 늘 함께 있어줘서, 항상
동해바다를 지켜줘서, 고맙고 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만약 1년 전 그때 내가 현실에 안주하여
공익으로 군복무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냥 감정에 휩쓸려 하고 싶은 것만 하거나 놀기에 급급하거나 학업에
열중하느라 주변과 나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도전이 무서워 나아가지 못하는 약한 내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나를 한층 더 발전시켜준 군대에 대해서 나는 항상 고맙고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이 기대가
되기만 한다. 물론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제한사항이 많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군대라는 조직을 사회 생활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부대끼면서 나의
장점은 찾고 단점은 버릴 수 있다. 또, 각자의 인생에 대해 간접적인 경험을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 바쁜 현대 대학생으로서 겪는 고충들 속에 잠깐의 휴식기라
생각하고 미래에 대해 설계를 할 수 있는 시간, 늘 옆에 있어 소중한지 몰랐던 가족들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군 입대를 앞두고 고민하는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나라를 위해 모인다는 것,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주저하지
말고 당당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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