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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 덕혜옹주를 통해 되짚어보는 우리의 아픈 역사, 어찌 잊으리!!

조우옥 2016. 8. 31. 15:03


<영화 덕혜옹주 포스터>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영화 덕혜옹주를 통해 되짚어 보는 우리의 아픈 역사, 어찌 잊으리!!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를 소재로 한 영화 "덕혜옹주"를 보셨나요? 우리의 아픈 역사 덕혜옹주를 소재로 한 영화가 관객 500만 이상을 돌파했다는 게 반가우면서도 가슴 답답함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에요. 얼마 전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 "귀향은 너무 가슴 아픈 소재라 볼 수가 없었다." "팍팍한 현실도 머리 아픈데 영화까지 가슴 답답해지는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아 영화 "덕혜옹주"보다 "귀향"은 사람들이 많이 본 영화는 아닙니다.

 

사실 저도 극장에서 상영할 땐 너무 가슴 아픈 소재라 망설이다 못 봤는데, 제가 거주하는 시에서 시민을 위한 영화제 상영할 때 보았더니, 역시나 영화를 보는 내내 한숨과 눈물이 절로 나왔습니다.

 

만 13세의 어린 나이에 강제 일본 유학길에 오른 비운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우리의 아픈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맞지만, 가슴 아프다고 덮어들 수만도 없는 우리의 아픈 역사입니다. 잘못된 역사는 후손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가슴 아픈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고 국가 안보를 더 굳건히 지켜나가는 거 또한 후손의 역할이겠지요.


 

제가 쓰고자 하는 글은 "덕혜옹주" 영화감상문이 아닌,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상기해서, 국가 안보를 굳건히 하자는 취지아래 글을 쓰고자 하니 영화 스토리나 영화평은 영화사 사이트를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덕혜옹주 역 손예진>

 


1912년 5월 25일, 고종 회갑이 되던 해 덕수궁에서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가 태어납니다. 고종이 금지옥엽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덕혜옹주에게 일본 유학을 강요합니다.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에게 동경 유학을 명합니다. 결국, 덕혜옹주는 14세 어린 나이에 궁궐을 떠나 낯선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덕혜옹주의 비운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고,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 1929년 생모 양씨의 사망으로 낯선 일본 땅에서 고아가 됩니다. 여자학습원에 다닐 당시 덕혜옹주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덕혜는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늘 보온병을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결혼마저도 일제의 정략결혼으로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합니다. 일제의 정략결혼으로 일본인 아내를 맞은 영친왕과 같은 운명으로 일본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영화 덕혜옹주 속 명대사>

 

 

 

  *영화 덕혜옹주 속 명대사!!

  *덕혜옹주:"나는 낙선재에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독립군 김황진:"저승에서 광복을 맞이하겠습니다."

*독립군 복동:"조국 때문에 이리되신 걸 후회하십니까?"

*덕혜옹주:"우리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저도 끝까지.........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망국의 옹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던 것일까요? 덕혜는 결혼 후 조현병에 시달리다 1946년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옹주 덕혜는, 부모를 일찍 잃고 자식도 잃은 충격이 컸던 탓인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됩니다.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고국의 궁궐에 돌아가길 희망한 덕혜옹주, 그러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박정희 정부 시절에 탄원서를 다시 올려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조선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右)와 비운의 삶을 살다 간 덕혜옹주(左) - 사진 출처:국립고궁 박물관>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37년 만에 고국에 귀국합니다. 14세 꽃다운 소녀로 일본 땅에 갔다가 51세 초점 없는 눈매, 초췌한 얼굴로 고국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일간지는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 자라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 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결혼을 하게 되자 모든 것이 구슬프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덕혜옹주의 아픔을 기록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하고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는 정신이 맑을 때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라고 낙서를 썼습니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실어증과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9일 뒤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합니다. (덕혜옹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힘)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덕혜옹주"가 역사를 왜곡하고 덕혜옹주를 너무 미화했다는 여론을 저도 들었지만, 영화는 어차피 픽션이 가미된 허구적 상상력과 재미를 더한 것이기에 영화는 영화일 뿐, 그냥 영화로서 즐기는 게…….

 

그러나 덕혜옹주를 미화했든 안 했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가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일본인과 강제 결혼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 청춘을 일본땅에서 쓸쓸히 지냈던 거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아픈 역사입니다.

 

 

미화했다고, 가슴 아픈 영화라고(귀향) 아픈 역사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해 부강한 나라가 되도록 노력하는 건 우리 후손의 역할이 아닐까요?






<취재: 청춘예찬 어머니 기자 구애란>





출처 : 청춘예찬
글쓴이 : 굳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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